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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픽(Pick) 문화공간/행사

관풍헌 마당에 엎드린 선비들

2026년 10월 25일
조현학
문화공간/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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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 김삿갓문화제 둘째 날, 영월읍 관풍헌에서 '조선시대 과거대전'이 열렸다. 안내문에는 한시 백일장이 함께 적혀 있다. 관풍헌 뜰에 돗자리가 줄지어 깔렸고, 돗자리마다 번호표가 붙었다. 그 위에 옥색 도포에 유건을 쓴 과시생科試生 수십 명이 엎드려 시문을 짓고 있었다. 낮은 담장 너머로 길 가던 이들이 고개를 빼고 들여다본다.

관풍헌은 옛 영월 관아의 객사 건물이다. 청령포에 홍수가 나자 단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머물다 생을 마쳤다. 그 마당에서 다시 과거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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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고 김삿갓문학관의 설명으로는, 김병연은 영월 동헌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가산군수 정시의 충절을 기리고 김익순의 죄를 꾸짖으라는 시제를 받아 장원을 했다. 그가 매섭게 꾸짖은 선천부사 겸 방어사 김익순이 자기 할아버지라는 것을 나중에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조상을 욕되게 했다는 자책에 하동(김삿갓면의 이전 이름)으로 옮겨 숨어 살다가, 스물넷에 아들 익균을 얻은 뒤 길을 떠났다고 한다.

재단 공고를 보면 녹명과 입문은 오전 10시부터, 시험은 정오부터 오후 2시까지다. 녹명錄名은 응시자가 이름을 명부에 올리는 접수이고, 입문入門은 확인을 마치고 시험장 문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정원은 선착순 150명이고 나이, 성별, 지역 제한이 없다.

'鄕' '長' '場' '芳', 그리고 마지막 한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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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試題는 축 난고김립문화제 祝 蘭皐金笠文化祭, 난고 김삿갓 문화제를 축하하라는 문제다. 형식은 칠언율시七言律詩. 일곱 자씩 여덟 구句, 모두 56자이고, 두 구씩 묶은 연聯을 차례로 수련首聯, 함련頷聯, 경련頸聯, 미련尾聯이라 부른다.

한시의 운韻은 구 끝 글자의 소리를 맞추는 약속이다. 한자를 울림이 비슷한 소리끼리 묶은 무리를 운목韻目이라 하는데, 같은 운목의 글자로 구 끝을 맞추면 읽을 때 소리가 되돌아와 노래처럼 울린다. 이번 운은 양陽운 계열이고, 운자韻字 다섯 중 '향鄕'·'장長'·'장場'·'방芳' 네 자는 지난 9월 22일 재단의 백일장 공고문에 미리 공개했었다. 마지막 한 자는 시험 당일 추첨으로 정하는데, 오늘 뽑힌 글자가 '창昌'이었다. 칠언율시는 첫 구와 짝수 구 끝, 곧 1·2·4·6·8구에 운을 다니 다섯 자가 딱 맞는다.

마지막 운을 당일에 뽑는 건 시를 통째로 지어 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일 텐데, 응시생들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어떤 이는 마지막 운으로 '광光'이나 '량涼' 같은 글자가 나올 것을 가정하고 미리 구절을 마련해 왔다고 했다. 陽운에 드는 글자가 많으니 몇 갈래로 대비해 오는 모양이다.

공고된 네 운자가 1·2·4·6구 자리에 정해져 있으니 여섯째 구까지는 미리 지어 올 수 있다. 추첨 운은 마지막 8구 끝에 오니, 현장에서 새로 짓는 것은 사실상 미련尾聯 한 연이다. 후보 글자도 양운에 드는 평성자 가운데 축원으로 맺기 좋은 글자 몇으로 좁혀진다. 그래도 짐작이 빗나가면 앞 구와 뜻과 평측平仄을 맞춰 즉석에서 끝을 지어야 하니, 승부는 결국 미련에서 갈리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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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눠 준 시지는 칸이 쳐진 답안지다. 수련, 함련, 경련, 미련 네 칸으로 나뉘어 있고, 운자 자리에 鄕·長·場·芳이 미리 인쇄되어 있다. 마지막 운 자리는 동그라미로 비워 두었다. 한쪽에는 시의 한글풀이를 적는 칸, 다른 쪽에는 주소와 성명, 전화를 적는 칸이 있다.

천막 아래 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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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한쪽 천막 아래에는 책상과 의자가 놓였다. 양복에 중절모 차림의 나이 지긋한 이들이 옥편과 운서를 펼쳐 놓고 앉아 있어서, 처음에는 웬 심사위원이 저렇게 많은가 했다. 알고 보니 모두 응시생이었다. 엎드리는 자세가 버거운 사람들이 그쪽에서 시를 짓는 것이다.

과시생들은 전국에서 왔다. 한나라 때는 지방 선비가 나라의 수레를 얻어 타고 시험을 보러 갔다 하여, 중앙 과거에 응시하는 일을 공거公車라 불렀다. 오늘의 응시생들은 나라 수레 대신 기차, 버스를 타고 왔다. 안산에서 온 여든 넘은 과시생은 퇴직하고 한문을 다시 배워 한시를 짓기 시작했다고 했다. 충북 보은에서 온 이는 한시를 지은 지 스무 해가 넘었다고 했다. 그는 한시 백일장이 10월에 몰려 날짜가 겹치니 다니기가 불편하다는 불만도 털어놓았다. 가을이면 전국을 도는 과시생들에게는 일정 짜는 일부터가 과거 공부인 모양이다.

고을 마당에서 치르는 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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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은 오후 2시에 마감했지만 급제자 발표는 4시가 다 되어서야 났다. 기다리는 동안 시상 내역을 살펴보았다. 갑과甲科 3명, 을과乙科 7명, 병과丙科 23명, 모두 33명을 뽑는다. 갑과 세 사람은 차례로 장원壯元, 방안榜眼, 탐화探花라 부른다. 이건 조선 문과의 마지막 관문인 전시殿試 방식이다. 전시에서 급제자 33명을 갑과 3인, 을과 7인, 병과 23인으로 나눴다.

그런데 김삿갓이 장원했다는 영월 백일장은 엄밀히 말하면 과거가 아니다. 백일장은 고을 수령이나 관찰사가 유생들의 공부를 북돋우려고 연 시문 겨루기여서, 장원을 한다고 곧바로 벼슬길이 열리지는 않았다. 과거는 따로 있었다. 지방에서는 소과와 대과의 첫 시험인 향시를 치렀고, 서울에서 복시와 전시를 거쳐 대과에 급제해야 비로소 관리가 됐다. 고을 마당에서 여는 재현이라면 향시가 어울릴 텐데, 영월은 대궐에서 치르던 대과 전시의 형식을 빌렸다. 단종 임금이 머물던 곳이라 그랬을까. 축제니까 기왕이면 크게 가자는 뜻으로도 읽힌다. 조선 시대였다면 갑과 장원은 종 6품 벼슬로 바로 나갔다. 오늘의 장원은 벼슬 대신 상금을 받는다.

관풍헌 기둥 앞의 방

채점은 한시협회가 맡았다. 채점위원에게 물으니 기준 가운데 평측이 있다고 했다. 평측은 한자를 평탄한 소리인 평성과 기울어진 소리인 측성으로 나눠, 구 안에서 둘이 번갈아 놓이게 하는 율시의 규칙이다. 시상식은 고선위원장의 강평으로 시작해 병과와 을과를 차례로 부른 뒤 마지막에 장원, 방안, 탐화 세 사람을 함께 불러냈다. 시상은 영월문화관광재단 대표이사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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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과에 급제한 세 사람은 모두 어사화를 꽂은 모자를 쓰고 연두색 옷차림으로 시상대 앞에 섰다. 중국에서는 급제를 두고 용문의 변화[龍門之化]나 대붕의 비상[海鵬之徙]과 같다고 했다. 용문은 후한 때 명망 높던 관리 이응李膺을 만나 인정받은 선비를 용문에 올랐다고 했다는 후한서의 고사에서, 대붕은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 리를 오른다는 장자의 붕새에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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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제자 방 위에 장원한 시의 시문을 큼직하게 붓글씨로 옮겨 덧붙였다. 난고가 남긴 향기가 영월 고을에 서려 있다는 말로 시를 열고, 관과 민, 남녀가 함께 웃는 경연 마당을 지나, 해마다 이어져 길이 번성하라는 축원으로 맺는다.

해마다 이어 길이 번창하라는 축시다. 김삿갓다운 비틂이나 해학은 보이지 않지만, 축하하라는 시제에 충실한 만큼 과거 답안이란 원래 정해진 틀 안에서 잘 쓴 글이다.

영시나 한시와 달리 지금 우리 시에는 구 끝의 운을 맞추는 규칙이 없다. 한시라 해도 우리 한자음으로 읽으면 성조가 없다. 그런데도 소리의 높낮이를 따지는 평측이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한시의 평가 기준에 포함된다니, 귀로는 들리지 않는 가락을 운서를 보며 눈으로 맞추는 셈이다.

1700년대 문인 화가 조영석의 관아재고觀我齋稿에 실마리가 될 만한 일화가 있다. 젊은 조영석이 벗 사앙과 과거 준비차 시를 짓고 있을 때,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둘의 시를 보자고 했다. 짝수 구[內句]의 첫 두 글자가 매번 평성인 것을 본 삼연은 크게 꾸짖었다. 과거용 시의 격식[科體]라고는 하나 옛사람들은 평성과 측성을 섞어 음절의 높낮이를 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평성뿐이니 무슨 음률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시험의 격식에 매이다 시의 소리를 잃을까 하는 걱정은 삼백 년 전에도 있었던 셈이다. 격률格律은 운과 평측처럼 율시가 지켜야 할 형식의 규칙을 말한다. 시험이니 격률을 따지는 건 당연하다. 다만 거기에 무게가 너무 실리면 흠 없는 시와 귀에 오래 남는 시가 따로 놀 수도 있겠다. 격률은 시의 문턱이고, 그 너머는 시인의 몫일 것이다.

이런 자리가 영월에만 있는 건 아니다. 가을이면 여러 고을에서 한시 백일장이 열리고, 시제를 내는 방식이나 운을 여는 방식, 등급을 부르는 이름도 고을마다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다른 고을 대회에서 상을 받은 이가 여기서도 이름을 올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대회가 10월에 몰려 겹친다던 보은에서 온 이의 말처럼, 전국의 과시생들이 가을마다 이 고을 저 고을의 과거장을 도는 모양이다.

 

이 컨텐츠는 문화도시영월 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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