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그래피라는 말을 오래전부터 들어오기는 했다. '그라피' 운운하니 글씨와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왠지 내가 유독 약한 미술의 영역으로 생각되어 관심 갖지 않았다.
글씨에 관한 나의 기억 몇 가지...
전통시대에는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꼽았다. 몸가짐, 말씨, 판단력과 함께 글씨를 사람의 됨됨이를 드러내는 지표로 삼은 것이다. 이는 쓰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획에 그대로 비친다는 '심획心畫'의 인식과 맥을 같이한다.
군대에서, 옆자리 동기는 밤마다 '차트를 그렸다.' 요즘 같으면 파워포인트 같은 거로 띄울 보고서를 매직펜으로 작성하던 시절이었다. 자료는 언제나 늦게 내려왔고, 내일 아침 보고하러 사령부에 올라갈 지휘관을 위해 '쫄병'은 서 밤을 새워야만 했다. 사단장이 좋아하는 서체가 정해져 있으니 아무나 대신 쓸 수도 없었고.
'내가 쓰는 영월' 서체 발굴 강의를 듣게 되었다. 앞으로 10주 동안 매주 목요일, '역전충전소' 2층에 모여서 배우고 쓴다.
추상화 앞에 서면, 남들은 '어렵다'고 하지만 나는 그 말조차 떠올리기 힘들다. 그냥 사고가 멈춘다. 모자란 감상 능력을 작품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추상화를 서예처럼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씨 또한 구상이 아닌데 우리는 좋은 글씨를 알아본다. 익숙한 글자 모양이 힌트를 주긴 하지만, 사실은 획의 굵기나 여백의 호흡 같은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서체를 만들 때 감각을 선과 형태로 바꾸는 과정이, 화가가 내면의 느낌을 화면에 옮기는 과정과 닮아 있다면? 그 비슷함이 내가 칸딘스키를 이해하는 작은 우회로가 될지도 모른다. 라는 뜬금없는 기대를 품어본다.
2000년 전 로마 석공부터 스위스의 '평화주의' 서체까지
강의는 예상과 다르게 시작됐다. 붓을 잡는 게 아니라 로마 유적 티투스 개선문의 부조 사진부터 띄웠다. 돌에 새겨진 라틴 문자들의 글자 크기가 균일해 보이는데, 가까이 보면 아래쪽이 조금 작고 위로 갈수록 커진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사람의 시선을 미리 계산했다는 설명이다. 2000년 전에 이미 글자를 그냥 쓴 게 아니라 설계했다는 얘기다.
다음은 고디바, 루이비통 등 유럽의 명품 브랜드 차례였다. 원래 마구馬具를 만들던 공방에서 시작된 브랜드라, 단단한 가죽의 이미지와 서체가 맞닿아 있다는 에르메스의 로고 설명까지... 브랜드의 역사와 폰트 선택이 우연이 아니로구나.
그리고 이야기는 유럽 근대사로 넘어갔다. 1·2차 대전에 참전하지 않은 중립국 스위스의 한 대학에서 개발한 서체가 바로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헬베티카 라고 한다. 글씨 하나에 국가의 역사가 담긴다는 게 실감됐다.
다시 아날로그로
강사는 여러 브랜드의 예전 로고와 지금 로고를 나란히 놓고 흐름을 보여주었다. 세리프에서 산세리프로, 그리고 요즘은 다시 세리프로 돌아오는 추세라고... AI 시대일수록 오히려 사람 냄새나는 글씨체를 찾는다는 것이다. 피시에서 문서 작성할 때 무심하게 골랐던 서체에 이런 시대의 흐름이 담겨 있었다니.
생기는 의문
한글 서체 개발에 그렇게 공을 들이고, 해외에서도 케이팝의 영향으로 한글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정작 도시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시각적 언어의 풍경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간판, 상품, 청첩장, 전시 포스터, 작가 이름까지 로마자가 기본값처럼 쓰인다.
문화사대의 잔재인가? 한글이 디자인적으로 열등해서? 아니면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영문을 ‘세련됨’ (있어 보임)의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닌지.
강사의 말처럼 서체가 브랜드의 정체성이라면, 우리의 로마자 사랑에 어떤 철학이 담겨 있는지 궁금하다. 앞으로 10주 동안 천천히 붙잡고 생각해 볼 작은 딴생각 하나가 생겼다.
광산체
이번 워크샾은 영월군 각 면의 고유 서체를 개발하는 목적도 있다고 한다. 나는 영월 지역의 근대 산업유산인 석탄 광산을 상징하는 서체를 새겨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투박하고 검지만 빛을 받으면 단단하게 반짝이는 석탄 특유의 질감. 깊은 지하의 검은 돌이 결국 지상으로 올라와 세상을 따뜻하고 환하게 밝히는 그 숭고한 헌신. 이 막장의 이야기를 글자의 획과 굵기, 날카로움 속에 녹여낼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내 손글씨가 가장 강력한 무기다.'
'명필이든 악필이든 상관없습니다. 평생 써 온 본연의 손글씨 감각이 가장 강력한 원천입니다.' 강사의 격려에 용기를 얻어 디지털 자판에 잃어버린 손의 기억을 복원하는 10주가 될 것 같아 설렌다.
[이 콘텐츠는 영월문화관광재단 문화도시 재생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