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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픽(Pick) 문화공간/행사

[영월] 정조가 설계한 영원한 동행: 장릉 배식단

2026년 05월 29일
조현학
문화공간/행사

 

영화 '왕사남' 흥행 덕에 영월은 그야말로 역대급 문전성시다. 유적지 근방은 평일인데도 관광버스가 소풍 가는 날 아침처럼 줄을 섰다. 인구 소멸 지역인 영월에서 교통 체증은 진풍경이다. 왠지 주차 정리하는 이들도 신이 나있는 듯하다.

영월에서 열리는 여러 축제 중에 '단종문화제'가 있다. 지역 대표 향토문화제로서 조선 6대 임금 단종과 그 충신들의 애사를 축제로 승화시켰다. 올해는 4월 24일에서 26일까지 동강 둔치, 장릉 등 영월읍 일원에서 대규모 행렬과 미식제, 공연, 그리고 화려한 불꽃놀이와 드론 쇼까지 다채로운 행사가 쉴 틈 없이 열렸다.

 

볼거리 먹거리 가득한 축제장을 누비더라도, 정작 판을 깔아준 주인공인 단종 임금에게 인사 정도는 해야 예의가 아닐까? 단종제례가 봉행되는 장릉으로 발길을 돌린 이유다. 축제는 산 자를 위한 것이고, 제례는 죽은 자와 나누는 대화다.

오전 10시 제례 시작을 앞두고 여유 있게 장릉에 발을 들였다. 정자각 앞 탁 트인 광장을 마주 보고 관광객과 주민, 그리고 지역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벌써 구역을 나누어서 좌정하고, 제례를 주관할 헌관獻官들과 진행을 돕는 제집사諸執事는 홍살문 지나 향·어로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헌관 중에서 첫 잔을 올리는 초헌관이 제사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단종제례는 영월 군수가 초헌관이다. 이번엔 지방선거 시기와 겹쳐서 군수 직무대행을 맡은 부군수가 초헌관을 맡았다.

돌을 깔아놓은 향로香路와 어로御路가 홍살문에서 광장을 가로질러 정자각까지 이어진다. 신도神道라고도 부르는 향로는 혼령이 다니는 길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임금도 제관도 향로를 밟아서는 안 된다. 유일한 예외가 향과 축문을 받들고 가는 대축大祝이다. 혼령을 부르는 향과 혼령에게 전하는 글인 축문을 들고 혼령의 길인 신도를 걸어간다는 논리다. 

정자각丁字閣은 조선 왕릉 제례 공간의 핵심 건물로서 말 그대로 한자의 '정丁'자 모양을 하고 있다. 대개 왕릉의 정자각에서 봉분 정면을 바라보면 시선이 자연스럽게 위로 향하지만, 장릉은 봉분 앞 공간이 좁고 경사가 심해서 정자각을 능침 바로 앞에 둘 수가 없었다. 제관들은 정자각에서 고개를 바짝 젖혀야 능침이 보인다.

 

 나는 막는 사람도, 줄도 없는 '단속이 허술한' 배식단配食壇 앞에 자리를 잡았다. 어차피 자리에서 정자각은 까마득해 잘 보이지 않을뿐더러, 내 관심은 처음부터 능제陵祭보다 배식단에서 올리는 충신제향忠臣祭享에 있었다.

조선의 40기 왕릉 중에서도 장릉은 유독 예외가 많다. 능은 도성에서 100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깨고 머나먼 영월 땅에 떨어져 있는 것부터 그렇다. 산자락 지형을 따르느라 묘와 정자각이 일직선이 아닌 'ㄱ' 자로 비껴앉은 구조 또한 다른 왕릉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장릉의 정체성을 완성한 파격은, 바로 신분을 가리지 않고 268위의 충절을 단종 곁에 불러 모은 배식단이다.

배식이라 하면 구내식당에서 줄 서는 게 먼저 떠오르지만, 전통시대에는 '기릴 만한 인물의 신주를 사당이나 문묘에 함께 모셔 제사를 올리는 것'을 말했다. '배향配享'과 비슷한 의미인데 배식은 특히 제사 음식을 함께 받게 함을 강조한다. 장릉의 배식단사는 단종에게 충절을 바친 인물을 골라서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시설이다.

배식단

장릉에 충신들을 추모하는 공간이 처음부터 배식단이었던 건 아니다. 숙종 때, 장릉 경내에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육신을 모시는 사당을 따로 세워 육신사六臣祠라 불렀다. 이후 단종이 복위되고 노산군 묘 가 장릉으로 격상되면서 육신사는 '창절彰節'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이 되었다. 서원의 규모가 커져 장릉 경내를 벗어나 영월읍 영흥리로 자리를 옮긴 것이 지금의 창절서원이다.

충신들을 모시는 공간이 왕릉 밖으로 나간 자리가 허전했는지 정조 임금이 새로운 결단을 내렸다. '당시에 절의를 다한 사람들을 합쳐 하나의 사판祠版[위패]으로 만들어, 본릉本陵 홍살문 밖에 터를 잡아 매년 한식에 함께 제사를 지내며, 고을원으로 하여금 집을 하나 지어서 사판을 보관하게 함으로써 똑같이 제사 지낸다는 뜻을 보여야겠다.'

정조는 잘 챙기라고 한마디 툭 던지고 끝내는 성격이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5년 (1791), 2월 21일 기사에는 왕이 배식단 조성 사업에 있어 추모의 위계를 직접 설계하고, 깨알같이 정교한 세부 지침을 하명한 내용이 고스란히 실려있다. 죽어서 왕의 곁으로 돌아온 이들이지만 유교적 질서를 유지하고 의례가 지나치게 번잡해지는 것을 막으려는 정조의 합리적인 배려가 엿보인다.

지침의 핵심은 공간과 절차를 변별해 '예법의 질서'를 시각화하는 것이었다. 제단을 이원화하여 정단正壇과 별단別壇으로 나누었으며, 별단도 신분에 따른 서열의 선을 분명하게 그었다.

[사진 속 제단 1] 정단: 안평대군을 위시한 육종영[왕족], 삼상신, 사육신 등 사적이 뚜렷하고 공로가 큰 32인을 모셨다. 특히 신분은 낮으나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를 정조의 특명으로 이 반열에 포함시켰다. 이곳에는 ‘충신지위忠臣之位’라는 당당한 이름표가 붙었다. 정조는 이들을 위해 직접 축문까지 지어 내리고 상차림은 유교 법도를 따랐다.

[사진 속 제단 2] 별단 중앙 - 조사위朝士位: 벼슬을 했던 자들의 자리다. 정조는 별단의 위패를 세 판으로 나누게 하면서도, 관리들의 판은 '약간 앞으로 나오게 하라'는 명을 내려 그들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다.

[사진 속 제단 3, 4] 별단 좌우 - 환관·군노위 (제단 3) 및 여인위(제단 4): 맹인, 군사, 노비와 여인들의 자리는 '약간 밑으로 내리라'고 조율했다.

생육신 배향

정조와 신하들은 생육신이 죽은 사육신과 마찬가지로 선왕에게 충성을 바친 의리는 같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왜 창절사에 생육신 6명 중 김시습과 남효온 2명만 사육신과 함께 배향했을까?

첫째 이유는 '압축의 미학'이다. '포상은 간략할수록 귀중해진다'는 개념이다. 너무 많은 인원을 수용하면 사당의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논리로 상징성이 가 장 큰 두 명으로 범위를 좁힌 것이다. 김시습은 세종의 총애를 입은 신동으로서 절간에 은둔하며 끝까지 지조를 지킨 점, 남효온은 소릉(현덕왕후의 능)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육신전을 지어 충신들의 이름을 보존한 점 등 그 행적이 독보적이고 후세에 끼친 영향이 크다고 보았던 것이다.

둘째는 현실적인 '민원 폭주' 우려였다.(채제공의 의견) 만약 6명 생육신 모두를 받아들인다면, 전국 문중의 상소가 쏟아질 게 뻔하니 애당초 불필요한 논쟁의 불씨를 잠재우겠다는 재상 다운 단호한 대처다. 결국 기존에 배향된 2인으로 선을 그었다.

 

정자각에서 사회자 격인 집례가 절차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배식단에는 이미 제물과 별단의 위패가 올라가 있고 충신위 위패만 제례 직전에 장판옥에서 제단으로 옮겼다. 단종제례에서 세 번 올리는 술잔 중 첫 잔인 초헌이 끝나자, 정자각에 올라가 있던 짙은 녹색 조복 ( 영화에서, 신하가 통촉하시옵소서 할 때 입는 옷)의 배식단 헌관이 장판옥 앞 배식단으로 걸어내려온다. 정자각에서는 아헌과 종헌 [둘째, 셋째 술잔]이 이어지며, 배식단에서도 비로소 충신들을 위한 헌작이 시작됐다. 한 잔씩만 올린다. 돌림노래처럼 왕의 제사와 신하들의 제사가 한 공간에서 한 박자 비껴가며 봉행되었다. 배식단 집례는 '행전작례行奠爵禮', '삽시정저揷匙正箸' 등 한문으로 된 순서[홀기笏記]를 읽고 '잔을 잡고 올리시오', '수저를 꽂고 저를 시접에 놓으시오.'라고 우리말로 풀어준다. 단종 제례와 배식단 제례를 영월 향교와 창절서원이 해마다 번갈아 주관하는데 올해는 배식단이 서원의 차례라고 서원의 관계자가 귀띔해 준다.

 

 

충신위 정단에 잔을 올린 후, 축문이 낭독되었다, 정조 임금이 직접 지어 내렸다는 그 축문이다. 몇몇 사람이 셔터를 누르느라 제상 앞까지 바짝 다가섰지만, 무례한듯해 나는 기다렸다가 제사가 끝난 뒤 부탁해서 한 장 찍을 요량을 했다. 그러나 제례의 끝은 망료望燎, 즉 축문을 불살라 하늘로 보내는 절차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다행히 나중에 창절서원과 영월 향교에서 흔쾌히 홀기笏記를 내어준 덕분에 겨우 그 문장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민간 제사는 집안 어른의 기억과 관행으로 돌아가지만, 수십 명의 제관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왕릉 제례는 '대본'이 필수다. 이를 홀기라 부른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영월향교발행 홀기 일부: 영월향교 제공

 

장판옥 안쪽 벽에 축문이 걸려있다.'當宁御製 : 지금 재위하고 있는 임금이 친히 만들었다.'로 시작한다.

 

정조의 어명은 명확했다. '매년 한식에 제사를 지내라.' 이 지엄한 명에 따라 장릉에서는 지금도 매년 4월 5일을 전후한 한식날, 화려한 카메라 조명이나 관광객의 소란 없이 고요하고 엄숙하게 정식 제향을 봉행한다. 2007년부터 방문객의 편의와 참여를 위해 (4월 마지막 주) 단종문화제 기간 중에 제례를 재현하고 있다고 들었다. 

장릉 제례에 며칠 앞서 영월읍 보덕사에서는 단종대왕 영산대재를 지냈다. 부처님의 설법 자리를 재현하여 모든 생명의 안녕을 축원하는 의례다. 

 

 

장릉 단종제례와 보덕사 영산대재는 단종을 향한 지극한 추모의 마음을 공유하되, 죽음을 대하는 접근 방식은 갈린다.(라고 생각한다.)

장릉의 유교식 단종 제례는 '붙잡는다'. 홀기에 따라 분 단위로 규정된 엄격한 절차 속에 정자각의 공기는 장중하다. 제관들의 소리 없는 움직임, 그리고 정적을 깨는 축문 낭독... 이것은 떠나간 혼을 다시 불러 앉혀 정성껏 대접하는 '효孝'의 의식이다. 영원히 우리 곁에 머물러 달라는 지독하게 인간적인 붙잡음이다.

보덕사의 영산대재는 '보낸다'. 장릉의 정적과는 대조적으로, 보덕사에는 범패 소리가 울려 퍼지고 화려한 관음무가 허공을 가른다. 연꽃이 흔들거리는 그 현장은 한 맺힌 혼을 달래어 저 멀리 극락으로 떠나보내는 '천도薦度'의 축제다.

격식을 갖춰 혼을 머물게 하는 유교의 정성과, 꽃과 춤으로 먼 길을 배웅하는 불교의 자비가 어우러져 영월의 봄을 채우고 있었다.

자료 제공 및 도움말 : 창절서원 , 영월 향교

[이 콘텐츠는 영월문화관광재단 문화도시 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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