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아카이브

경계는 무대 위에만 있지 않았다: 영월의 작은 공연장에서 본 어느 정기연주회

2026년 09월 09일
문화예술지원
문화예술활성화
52

마지막 곡이었다. 국악 연주 소리에 맞춰 두 사람이 탱고를 췄다. 아르헨티나에서 건너온 춤과 우리 악기가 한 무대에서 같은 리듬으로 움직이는데 객석 어딘가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잠깐 웃었다. 이 공연이 정말 넘은 경계가 뭔지 그 순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난 8월 22일 토요일 오후, 영월 덕포 영월드 어울림센터에서 퓨전국악앙상블 류의 두 번째 정기연주회 「소리, 경계를 넘다」가 열렸다. 가야금과 대금, 피리와 타악이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와 함께 무대에 섰고 한국무용과 탱고까지 더해졌다. 제목이 말하는 경계란 국악기와 서양악기, 연주와 춤 사이의 것들이었다.

 이런 표제는 흔하다. 흔한 만큼 구호에 그치는 경우도 많아서 나는 이 공연이 그걸 실제로 해내는지를 보려고 했다. 결과부터 말하면 해냈다. 다만 방식이 좀 특이했다.

첫 곡 ‘아름다운 나라’는 악기 차원에서 이미 경계를 허물고 시작한 곡이었다. 국악기와 서양악기가 한 소리로 어우러지는 걸 듣는 순간, 관객은 이 공연이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경계라는 말을 풀어갈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어진 ‘낙화암’은 새로운 장르를 끌어들이기보다, 물가의 기억과 이별이라는 정서에 잠시 머무르며 소리 자체에 집중하게 해주는 곡이었다. 다음에 이어질 만남들을 위한 숨 고르기 같은 자리였던 셈이다.

 세 번째 곡 ‘계절가’에서는 경계가 소리에서 몸으로 옮겨갔다. 음악과 한국무용이 만나면서, 이번에는 듣는 것과 보는 것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네 번째 곡 ‘열두 달이 다 좋아’에서는 그 경계가 한 사람 안으로 들어왔다. 가야금 연주자가 악기를 연주하면서 동시에 노래를 부르니, 연주자와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역할 사이의 경계마저 흐려진 셈이다. 다섯 번째 곡 ‘프론티어’는 제목 그대로, 지금까지 좁혀온 거리를 이제 완전히 새로운 길로 넘어가겠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그리고 마지막 곡 ‘리베르 탱고’에 이르러서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두 세계가 만났다. 국악기와 아르헨티나에서 건너온 탱고라는, 태어난 나라도 역사도 다른 두 장르가 한 무대 위에서 하나의 리듬으로 움직였다. 악기에서 시작해 몸짓으로, 한 사람의 역할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문화권 자체의 거리로까지. 이 공연은 곡이 하나씩 지날 때마다 넘어야 할 거리를 조금씩 넓혀가며 ‘경계를 넘다’라는 제목을 순서 그대로 증명해 나갔다.

 이걸 지켜보면서 든 느낌은 단순히 신기하다는 것보다 조금 더 컸다. ‘계절가’에서 소리와 춤이 따로 놀지 않고 하나처럼 움직이는 순간, ‘열두 달이 다 좋아’에서 연주자가 악기와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오가는 모습을 볼 때, 그리고 국악기 소리에 맞춰 탱고를 추는 두 분을 볼 때마다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원래 국악과 서양음악, 연주와 춤 사이에 있다고 믿었던 그 선이 사실은 우리가 마음대로 그어놓은 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익숙한 것과 낯선 것 사이의 선이 흐려지는 그 짧은 순간들이 이 연주회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었다.

 콘서트가이드님은 경계를 넘는다는 게 어느 한쪽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간직한 채 한 걸음 다가가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 말대로였다. 이날 대금은 끝까지 대금이었고 탱고는 끝까지 탱고였다. 섞여서 사라진 게 아니라 각자인 채로 나란히 섰다. 여러 장르를 한 무대에 올리면 자칫 이것저것 얹어놓은 것처럼 산만해지기 쉬운데 이 공연에서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각자 자기 순서만 하고 물러나는 식으로 따로 놀지도 않았다. 서로의 색을 분명히 지키면서도 같은 호흡으로 움직이니 무엇과 무엇이 만나고 있는지가 오히려 또렷하게 보였다.

 그런데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다른 데 있었다.

이 공연은 관객을 가만히 앉혀두지 않았다. 콘서트가이드는 악기들을 가리키며 이 중에 아는 게 있느냐고 물었고 그 외에도 곡 사이사이 객석에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며 대답을 받아냈다. 연주자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짧게 곁들였다. 연주자들 역시 객석을 향해 손뼉을 유도하거나 말을 건넸다. 무대 위에 서 있는 사람과 앉아서 보는 사람이라는 구분을 스스로 풀어놓는 쪽에 가까웠다. 해설이 길어져 지루해지는 순간도 없었다. 딱 필요한 만큼만 짚어주고 나머지 시간은 계속 객석 쪽으로 열어두며 무대에서 일방적으로 보여주고 끝나는 공연이 아니라 관객이 대답할 자리를 만들어두는 공연으로 만들었다.

그러니 객석도 자연스럽게 열렸다.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부터 어르신들까지 앉아 있었는데 곡이 끝날 때마다 박수가 아낌없이 나왔고 흥이 나는 대목에서는 추임새가 섞였다. 이 사람들 대부분은 평소 국악 공연을 찾아 듣는 사람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서울이었다면 몇 만 원을 내야 볼 수 있었을 구성인데 여기서는 걸어 들어와 그냥 앉으면 됐다. 이번 공연은 영월문화관광재단이 주최하고 영월군이 후원하는 2026 청년예술 지원사업 선정작으로 티켓이 전석 무료였기 때문이다.

 공연의 마지막 멘트는 “경계를 넘어, 이웃으로”였다. 그리고 그 말은 무대가 끝난 뒤에 한 번 더 확인됐다. 공연이 끝나고도 사람들이 바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 관객들이 연주자들에게 다가가 공연 잘 봤다고 인사하고 연주자들은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답했다. 방금 전까지 무대 위에 있던 사람과 객석에 앉아 있던 사람이 그렇게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앞의 것들이 하나로 꿰어졌다. 이 공연이 넘고 싶었던 경계는 애초에 무대 위에만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장르와 장르 사이를 넘는 일은 결국 예술가들끼리의 일이다. 어렵고 값진 일이지만 무대 안에서 끝난다. 그런데 국악을 찾아 듣지 않던 사람이 객석에 앉아 아는 악기 이름을 떠올려보고 무대에 추임새를 넣고 끝난 뒤에는 연주자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는 순간, 경계는 무대 밖에서 넘어간다. 나는 이쪽이 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구가 계속 줄어드는 군 단위 지역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웃이라는 말은 생각보다 무거운 단어다. 한 번 스쳐 간 사람을 이웃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같은 자리에 계속 있어야 비로소 이웃이 된다. 그런 점에서 이 공연이 두 번째 정기연주회였다는 사실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지역 예술이 가장 자주 걸려 넘어지는 지점은 한 번은 하지만 두 번은 못 하는 데 있다. 서울로 올라가지 않고 이 지역에 남은 예술가들, 국악과 클래식과 무용을 하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찾아내 무대를 만들고 그걸 동네 사람들 앞에 무료로 내놓는 일을 두 번째 이어갔다. 이웃이 되겠다는 말은 그렇게 계속하겠다는 약속에 가깝다.

 물론 아쉬움도 있었다. 공연장은 큰 무대가 아니라 동네 문화센터에 가까운 규모였고 조명이나 무대 장치는 그만큼 소박했다. 연주와 춤의 완성도에 비하면 그것을 받쳐주는 조건이 분명 부족했다. 다음에는 이 팀을 좀 더 나은 무대에서 보고 싶다.

 그래도 나는 그날의 추임새 쪽을 더 오래 기억할 것 같다. 이런 무대는 기록해두지 않으면 열렸다는 사실조차 남지 않는다. 몇 곡을 연주했고 몇 명이 왔는지는 어딘가 자료에 남겠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만 적을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날 그 공연장 안에서 무대와 객석이 잠시 이웃이 되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댓글

0개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